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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알림마당 > 본당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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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교육분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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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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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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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사순절 특강 2회
주제: 생활 속의 전례란?
강사: 조학균베드로신부님 (예수회 수사신부)
요약: KAIST 경영대학원 이은미 클로틸다양과 남석우 요한위원장님
전례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시고,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 하면서, 서로의 사랑과 관심을 체험하게 된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찬미와 흠숭을 바치고, 자신의 성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전례가 시작되고, 완성된다.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하느님을 향하여 인간 스스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예절을 시작함으로써,
종교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신앙 안에서 전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신부님께서 ‘아침에 일어나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들 듣고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에 집중하는가에 대해 반성해 본다. 우리는 대부분 하느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찾지 않고 보다 심오한 곳에서 찾으려 하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찾기 힘들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흔히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내 기도를 듣고는 계시는가? 반문할 때가 많다. 이것은 대화가 서툴러 생기는 오해이다.
오래된 신자 중 ‘신앙생활이 오래 돼서 그런지 하느님께서 도통 내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하느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는지를, 하느님이 변하셨는지를 의심하는 말을 하는 분이 많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변한 건 하느님 아니고 나이다. 하느님을 믿으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믿게 된다. 믿고 사랑하면 오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말하는데 익숙해서 성체조배를 할 때에도 ‘하소연’만 하고 ‘듣기’가 별로 없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대화를 돕기 위해 성부 하느님께서는 보내신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중재자로 보내시어 우리의 원을 들어주시려 하셨다. 그리고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며 교회에게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라고 성사를 남겨주셨다. 교회는 성사를 집행하는 곳이며, 이 성사적 표시가 곧 전례이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제가 사제직을 수행함으로써 드러나며, 전례 안에서 표현되는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적 행위를 체험할 수 있게 한다. 교회는 전례가 교회 안에서 집행되는 행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며, 그 곳에서 우리는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된다.
유다인들의 전례는 가톨릭 전례와 다르다. 유다인들은 구약의 하느님을 만났으며, 구약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느님 체험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한 예절이 따로 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약의 하느님을 만났으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가 체험했던 신약의 하느님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한 가톨릭 전례가 따로 있다. 즉 우리가 체험했고 기념해야 하는 성사적 특징인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필요한 말, 정확한 말을 해야 한다.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해야 하느님께서 알아듣는 줄 착각한다. 그러나 기도할 때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우리가 말하려는 내용을 요약해서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식사 전 기도에는 함축된 언어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다. 1시간 이내의 미사 중에서도 미사통상문을 통해서 함축된 언어와 제스처로서 전례를 거행하기 때문에 전례모임에 참여함으로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사순시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자! 금연, 금주, 살빼기 등 고행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58장의 말씀>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엄청난 것, 남들이 보기에 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바칠 수 있는 것, 봉헌할 수 있는 것을 원하신다.
사순절의 신학적 의미 :사십일 동안 통회와 보속 그리고 희생을 통하여 제를 지키는 기간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위한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기간
‘부활절의 기쁨’의 진정성 (사순이 끝나서 기쁜가?) : 죽은 자만 기쁠 수 있다. 나는 죽지 않고 남을 죽인다. 상처 준 사람은 없는데 상처받은 사람만 많다. 하느님과의 계약, 셈법은 조금 다르다. 사순절에 행하는 것(배려)는 큰 가치를 가지며, 받은 자에게는 추억과 기쁨이 된다. 다가오는 파스카, 사순절을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부활절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결정됨을 명심하자!
전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심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실 때 어머니께 남겨두고 가셨다. 어머니 마음을 생각해 보자.
<요한복음 2장>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군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말하였다.>
잔치에서 부족한 것이 없는지 살피시는 어머니의 눈. 예수님의 몫과 성모님의 몫은 다르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로서 우리는 어머니께 필요한 기도를 함께 도와달라고 청구하는 것이다. ‘성모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와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성모님도 기도/전례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전례(미사/성사/기도/성모송/묵주기도) 안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전례는 실천적인 학문 – 직접 만남, 하나의 시간/공간 안에서 만남이다. 다른 학문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론적으로 무장시켜 준다.
생활속의 전례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전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전례는 우리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장이며 우리들을 인도해 주는 방법이다. 교회에서 미사나 기도나 성사를 정했지만 우리가 준비해야 될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떠나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신다. (돌아온 탕아) “여러분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으신다면 하느님 곁에 계십시오. 근처에 계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순은 단순히 고행하는 기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좀 더 잘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전례는 생활과 관련되어 있고, 신앙과 믿음에 기초하여 유지된다. 전례는 실천이 동반되는 예절이다. 성체성사 때 예수님의 몸과 피가 우리에게 오는 의미는 “나눔”이며 결국 너희도 서로에게 먹혀라,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느님을 전하라는 의미이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마음을 열고 전례에 참여하라. 하느님께서 찾아오신다.
*^^* 요약하느라 수고한 KAIST 경영대학원 이은미 클로틸다 양과 남석우 샘명위원장님께 감사의 박수와 축복의 기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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