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칠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들이 폐지를 주워 모은 돈을 선뜻 장학금으로 기부했다는 훈훈한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하루 종일 폐지를 모아 팔아도 수천 원이 고작, 그러나 틈틈이 모은 돈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할머니들은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내가 지금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폐품을 수집하면서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해졌다.
무엇보다 내 주변에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 “공부를 못한 것이 평생 한이 되어 나와 같이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을 위해 장학금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할머니들이 살아 있는 천사처럼 느껴진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남을 돕는 자선이야말로 인간다움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덕목이 아닐까.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내고 있다. 교회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4-5).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한 징벌과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억압받고 굶주린 이들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셨다. 또한 환자들을 치유하고 악마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해 주셨다.
이처럼 우리가 기다리는 구세주 메시아의 재림은 희망의 메시지이다.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은 영적으로 눈을 떠서 진실과 정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본다는 것은 중요한 인식 행위이지만 마음이 함께 따라야 바르게 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자신의 생각대로 사물을 본다. 생각이 딴 곳에 가 있으면 앞에 있어도 올바르게 보지 못할 때도 많다.
우리는 지금 오시기로 되어 있는 구세주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우리는 과연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가? 또한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들에게 자선과 나눔을 베풀고 있는가?
자선이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는 참된 연민의 정에서 비롯된다. 내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이웃은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아픔을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소경이며, 귀머거리와 다름없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금주 주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