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믿도록 태어났다. 나무가 과일을 맺듯이 인간은 믿음을 지닌다(에머슨).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티로와 시돈 지방은 현재 레바논의 항구 도시들이다.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부인’은 곧 그 지방 토박이 부인이란 뜻이고, ‘자녀들’은
하느님의 자녀 또는 아브라함의 자녀로 자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빵’은 구원을
뜻한다.
‘강아지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라
일컬었다(마태 7,6 참조).
이방인 부인은 구원을 유다인들에게 베푸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찬동을 하면서
구원의 조각이나마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부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 청을 들어 주셨다.
민족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었다(이사 25,9 참조).
복음서의 다른 곳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치유 이야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
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며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루카 5,20 참조).
현대의학은 사람을 약을 쓰거나 수술하는 대상으로 본다. 원인보다 결과를 중요시
한다.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것보다 어떻게 그 증상을 없애는가에 마음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을 중요시해야 한다.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어떤 지식만을 얻는 게 아니라 생을 걸고 뛰어들어가는
것이다”(안토니 블룸 주교).
부산의 한 본당에서 사목할 때 하루는 주일학교 선생의 부인이 찾아와 물었다.
“신부님, 요즘도 기적이 일어납니까?” “물론이지요. 왜 그러세요?” “신부님도
아시는 우리 큰딸, 유치원에 다니는 레지나요. 왼쪽 눈이 아프고 잘 안 보인다고
해서 안과에 다녔는데도 소용이 없어 걱정이었는데요.
친정 어머니께 얘기했더니….”
어머니는 “성당에 자주 데리고 다니면서 성수를 눈에 발라 줘라. 그러면 나을 게
다” 하시더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좀 짠 소금물인데 뭘!” 하며 웃어 넘겼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하라는 친정 엄마의 말에 힘든 일도 아니고 또 답답해서,
혹시나 하고 주일 미사만 오던 분이 딸을 데리고 평일 미사에도 자주 나와
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어 딸의 눈에 발라 주고 그랬는데 보름이 지났단다.
아이가 눈이 아프다는 말을 안 하고 책도 잘 보고 해서 “이게 기적인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해 주며, 친정 어머니의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아이를 돌보신 것 같다고 답을 했다.
믿음의 길이란 어디로 어떻게 갈지도 모르는 채 하느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맡기고
무작정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이 갔던 길이다. 두드려 보고 건너가는 돌다리
위가 아 니라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 사도의 모습처럼….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우리도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가자. 평화와 기쁨 안에 행복한 삶을
살아가자. 믿음으로 ♪ (가톨릭성가 480번)
박문식 신부님(금주 주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