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년 부인이 승용차 창문을 반쯤 내리고 부근에서
빗자루질하는 미화원 ㅂ씨를 불렀다.
ㅂ씨는 부인이 부르는 "아저씨"가 자신이란 걸 뒤늦게 알고 고개를 돌렸다.
'이거(일회용 종이컵) 어디에 버려요?'
(그걸 몰라서 묻나. 쓰레기통까지 가기가 그렇게 귀찮은가?)
'이리 주세요.'
ㅂ씨는 휴게소 미화원으로 일한 지 이 날로 꼭 한 달째다.
그런데도 "아저씨"란 호칭이 낯설다.
지난 27년 동안 "신부님"이란 소리만 듣고 살았기 때문이다.
안식년을 이용해 휴게소 미화원으로 취직한
청소부가 된 신부님" ㅂ신부.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 동안 휴게소 광장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며 빗자루질을 한다.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한 명도 없다.
기자의 "기습"에 깜짝 놀란 그는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인데'하며
사람들 눈을 피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 사는 게 점점 힘들어 보여서 삶의 현장으로 나와 본 거예요.
난 소신학교 출신이라 돈 벌어본 적도 없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워요.
신자들이 어떻게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집 장만하고,
교무금을 내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소위 "빽"을 경험했다.
농공단지에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갔는데 나이가
많아 받아주는 데가없었다.
아는 사람이 힘을 써줘서 겨우 휴게소 미화원 자리를
얻기는 했지만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란 걸 피부로 느꼈다.
그는 출근 첫날 빗자루를 내던지고 그만두려고 했다.
화장실 구역을 배정받았는데 허리 펴 볼 틈도 없이 바쁘고 힘이 들었다.
대소변 묻은 변기 닦아내고, 발자국 난 바닥 걸레질하고,
담배 한대 피우고 돌아오면 또 엉망이고….
그래도 일이 고달픈 건 견딜만 했다. 사람들 멸시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커피 자판기 앞에서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했다.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커피가 걸쭉하게 나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상태였다. ㅂ신부는 휴게소 직원으로서 자신의 동전을 다시 넣고
제대로 된 커피를 뽑아주었다.
그랬더니 그 여성이 '고마워요. 저건(걸쭉한 커피)
아저씨 드시면 되겠네'라며 돌아서는 게 아닌가.
'제가 그때 청소복이 아니라 신사복 차림이었다면 그 여성이 어떤
인사를 했을까요?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죠.'
ㅂ신부는 '그러고 보면 지난 27년 동안 사제복 덕분에 분에 넘치는
인사와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눈물젖은(?) 호두과자도 먹어 보았다.
아침식사를 거르고 나왔는데 허기가 져서
도저히 빗자루질을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트럭 뒤에 쪼그려앉아 몰래 먹었다.
손님들 앞에서 음식물 섭취와 흡연을 금지하는 근무규정 때문이다.
그의 한달 세전 월급은 120만원.
그는 '하루 12시간씩 청소하고 한달에 120만원 받으면 많이 받는거냐,
적게 받는거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또 '언젠가 신자가 사다준 반팔 티셔츠에 10만원 넘는 가
격표가 붙어 있던데…'라며 120만원의 가치를 따져보았다.
이번엔 기자가 '신부님이 평범한 50대 중반 가장이라면
그 월급으로 생활할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내 씀씀이에 맞추면 도저히 계산을 못하겠네요.
그 수입으로는 평범한 가장이 아니라 쪼들리는
가장밖에 안 될 것 같은데.'
그는 '신자들은 그런데도 헌금에 교무금에 건축기금까지 낸다'며
'이제 신자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강론대에서 "사랑"을 입버릇처럼 얘기했는데
청소부로 일해보니까 휴지는 휴지통에, 꽁초는 재떨이에 버리는 게
사랑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누군가가
그걸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평범한 일입니다.
또 과시할 것도 없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죠.
시기질투도 없습니다. 그게 참사랑입니다.'
그는 '신자들이 허리굽혀 하는 인사만 받던 신부가 온종일
사람들 앞에서 허리 굽혀 휴지를 주우려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다'며 웃었다.
그는 '퇴근하면 배고파서 허겁지겁
저녁식사하고 곧바로 곯아 떨어진다'며
'본당에 돌아가면 그처럼 피곤하게 한 주일을 보내고 주일미사에 온
신자들에게 평화와 휴식 같은 강론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날은 그의 마지막 근무일이다.
애초에 한 달 계획으로 들어왔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의 한달 체험을 사치라고 말했다.
'난 오늘 여기 그만 두면 안도의 한숨을 쉬겠죠.
하지만 이곳이 생계 터전인 진짜 미화원이라면
절망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다시 일자리를 잡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도 "빽"써서 들어왔는데. 그리고 가족들 생계는 당장 어떡하고.
그래서 사치스러운 체험이라는 거예요.'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 일터로 뛰어갔다.
한시간 가량 자리를 비운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 같다.
미화반장한테 한소리 들었을지도 모른다.
쓸고 닦고 줍고…
몸을 깊숙이 숙인 채 고속도로 휴게소를 청소하는 ㅂ신부.
그에게 빗자루질은 사제생활 27년 동안 알게 모르게 젖어든
타성에서 벗어나고,마음의 때를 씻어내려는 기도인지도 모른다.
조금 더 위였습니다
"조지 워싱턴(1732-1789)"이 군대에서 제대하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있던 어느 여름날,
홍수가 범람하자 물 구경을 하러 나갔더랍니다.
물이 넘친 정도를 살펴보고 있는데 육군중령의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초로(初老)의 워싱턴에게 다가왔습니다.
― 노인, 미안합니다만, 제가 군화를 벗기가 어려워서 그런데요.
제가 이 냇 물을 건널 수 있도록 저를 업어 건네주실 수 있을까요?
― 뭐, 그렇게 하시구려! 이리하여 중령은 워싱턴의 등에 업혀 그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 노인께서도 군대에 다녀오셨나요?
― 네, 다녀왔지요.
― 사병이셨습니까?
― 장교였습니다.
― 혹시 위관급(尉官級)이셨습니까?
― 조금 더 위였습니다.
― 아니 그러면 소령이었나 보네요.
― 조금 더 위였습니다.
― 그럼 중령이셨군요.
― 조금 더 위였습니다.
― 아니 대령이셨단 말씀이십니까?
― 조금 더 위였습니다.
― 아니 그럼 장군이셨네요.
[중령이 당황해서] 노인어른, 저를 여기서 내려 주세요.
― 냇물을 건너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소. 내가 업어 건네 드리리다.
― 노인께서는 그럼 준장이셨습니까?
― 조금 더 위였습니다.
― 혹시 중장이셨나요?
― 조금 더 위였습니다.
― 그럼 최고의 계급인 대장이셨단 말씀이세요?
― 조금 더 위였습니다.
이때 막 냇가를 다 건너게 되자 워싱턴이 중령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을 업어 준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육군 중령은 그 텁수룩한 노인이
당시 미합중국의 유일한 오성장군(五星將軍)이던 "조지 워싱턴"임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우리는 흔히 막노동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혹은 차림새가
조금 초라하다거나 몸에 걸친 의복이 다소 남루하다고 해서 사람을
낮춰보는 우(愚)를 범하기 쉽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말해 주는 일화(逸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