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20여 명의 일본인 기리시탄들은 33일 동안 630km를 걸어 죽음이 기다리는 이곳으로 왔다.
63세의 노인부터 12세의 어린이까지, 무사․상인․승려․의사․요리사까지, 국적도 나이도 직업도 구분하지 않고,
강한 자와 약한 자도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출발 후 하루도 쉬지 못하고, 한순간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처형지 니시자카는 어디에서든 잘 보이는 곳이었다.
대부분 기리시칸이었던 나가사키 주민 4천 명은 자신들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26명의 사람들이 도착한 25일은 수요일이었다.
순교자들은 예수처럼 죽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은 것은 십자가와 죽음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예수와 같이 금요일에 처형해달라는 그들의 소원은 폭동의 위험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수처럼 손과 발에 못질을 해달라던 바푸치스타 신부의 외침도 무시당했다.
그러나 소년들은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기도하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사 바우로 미키는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일본 땅에 신앙을 허락할 것을 도요토미에게 부탁했다.
한 사람마다 두 개의 창이 가해졌다.
결국 그들은 창 끝에 찔려 죽었다. 평범한 밭이었던 니시자카는 피로 물들었다.
이후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언덕에서 신의 이름으로 죽어갔다.
그들은 땅에서 죽었지만 땅에 묻히지 못했다.
신국의 땅이 이교도의 살로 더럽혀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막부는 그들 대부분을 바다에 버리거나 화장했다.
나가사키 순교의 상징이 된 26인 순교 조각상은 ‘승천의 기쁨’을 주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께 마음을 드린다’는 문장이 승천의 순간 속에 정지한 그들의 머리 위에 쓰여 있다.
순교 후, 26성인의 시신은 관에 담겨 바다에 수장되었다.
하지만 기리시탄 어부들이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성인들의 시신을 몰래 낚시로 수습했다.
그 시신들은 당시 동북아 기독교 선교의 중심이었던 필리핀의 마닐라로 보내졌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인 1862년, 26성인은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마닐라로 보내졌던 시신들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이 섞인 채 일본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