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느헤미야는 어떤 성서인가요?
에즈라, 느헤미야라는 성서 이름의 유래
본래 히브리어 성서에는 이 두 권이 ‘에즈라’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어요. 그런데 그리스어 성서인 칠십인 역 성서에는 이 두 권에다 두 권을 덧붙여 ‘에스드라서’라 불렀어요. 불가타 성서도 에스드라서 1,2,3,4권으로 갈라 놓았지요. 그 뒤에 각기 주인공의 이름을 따 에스드라서 1권은 ‘에즈라’로, 2권은 ‘느헤미야’로 이름지어졌고, 3권과 4권은 외경으로 분류되었어요. 에즈라- 느헤미야서는 ‘성문서’편에 속하며, 역대기 상·하와 함께 역대기계 역사서라고 불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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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썼나요?
탈무드 전승에서는 에즈라가 역대기와 에즈라서 앞 부분을 썼고 느헤미야가 여러 자료를 덧붙여 완성시켰다고 해요. 지금도 에즈라를 유력한 저자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역대기 사가 또는 역대기 편찬자가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남긴 자료와 그 밖의 여러 문헌을 모아 저술하고 편집했다고 보아요. 그 편집자(들)은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느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백성 공동체로 굳건히 세우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 레위족 사람일 거라고 해요.
언제 쓰여졌나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활동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460년경부터 380년경이에요. 그러니까 이 책은 그 전에 나온 자료와 에즈라 느헤미야 시대에 쓰여진 편지, 칙령, 수기 등 각종 자료를 담아 기원전 350-300년경에 쓰여졌을 거라고 추정해요.
왜 썼나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바빌론 포로기 이후 시대는 정말 어려운 시련의 시절이었어요. 고레스 대왕이 귀환시켜주어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미 팔레스티나의 땅들은 남아 있던 백성들과 주변 민족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어요. 땅이 없으니 경제생활은 빈곤하고 자기를 지킬 힘도 약하니 주변민족들이 수시로 괴롭혔어요. 포로 생활 동안 참으로 회개하여 어떤 어려움에서도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고자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점차 무기력해지고 생존에 급급하면서 혼란 속에 빠졌어요.
에즈라·느헤미야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과 좌절, 그러면서도 새롭게 제의 공동체로 일어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역대기가이스라엘 백성의 갈 길로 다윗 왕가의 충실한 신심과 제의의 회복을 강조했다면,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전 제의와 함께 율법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어요. 즉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지도한 것처럼,하느님께 받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제단과 성전, 도시를 재건하고 사회경제적 체제를 갖추는 것, 우상숭배를 배척하며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길이 곧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살아날 길임을 일깨워주고 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유대교는 그 틀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새김과 나눔>
바빌론에서의 귀환은 또 하나의 출애굽이었습니다. 풍요로움에서보다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께 다가가 회개한 이스라엘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하느님의 법전을 듣고 지키니
(느헤 1-13장)
느헤미야가 돌아와 성벽을 쌓고(느헤 1,1-7,5)
공사를 방해하는 산발랏에게 느헤미야는 무엇이라고 답변하였습니까?
(2,19-20)
이 대목은 느헤미야의 수기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샤의 고관이었는데, 동족인 유다인들이 심하게 핍박받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황제께 아뢰어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아 자신들을 방비하고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하자, 주변에 있는 세도가인 산발랏 일당이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느헤미야는 한편으로 무력으로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돈놀이로 동족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변리를 받지 않도록 조치를 내립니다. 마침내 공사를 시작한 지 52일만에 성벽수축 공사가 끝났습니다. 이렇게 잘 마칠 때까지 느헤미야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이 모든 일을 이룩하신 이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절기와 율법을 지키고(느헤 7,6-10,40)
* 단식하기 위해 모인 이스라엘 백성은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9,1-3)
느헤미야의 수기에 이어 에즈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수문(水門) 앞 광장에 모이자, 에즈라는 날마다 하루 종일 현재의 오경과 비슷한 형태로 된 모세의 법전을 들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가르침을 깨닫고 마냥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율법의 규정대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또 단식하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베푸신 은혜로운 역사를 회고하며, 자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 이처럼 무서운 고역을 치루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마침내 온 백성이 모세에게서 물려받은 법을 따라 야훼의 계약과 법령과 규례대로 살기로 맹약을 맺습니다.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 개혁하고(느헤 11,1-13,31)
느헤미야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어떤 조치를 내렸습니까?(13,15-22)
다시금 느헤미야의 수기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나”는 느헤미야를 가리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한 다음 예루살렘 성 봉헌식을 갖습니다. 그 다음에 사제와 레위인의 몫을 마련하여 아무 어려움없이 성전을 돌보도록 조치를 합니다. 십이 년 동안 총독으로 일한 후 페르샤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성전을 정화하고, 레위인들이 규정된 몫을 받도록 다시 조치하고 안식일에 일을 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느헤미야는 에즈라보다 앞서 와서 포로기 이후 피폐한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몹시 애쓴 사람입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벽 공사로 대변되듯 이스라엘의 외적인 제도와 질서를 세운 공헌자라면, 에즈라는 율법으로 이스라엘의 내적인 정신세계의 뼈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하느님의 종으로 일했음을 성서는 증언합니다.
<새김과 나눔>
느헤미야는 형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변리를 받는 돈놀이를 엄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오늘날 이런 정신에 비춰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을 묵상하고 의견을 나눠보십시오.
굿뉴스의 '성서와 함께' 에서 옮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