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글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중
김혜진님이 올린 요셉신부님의 복음묵상 글입니다.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 교회는 꾸중을 들어도 교회다 >
전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을 지닌 무서운 존재가 자신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척박한 사막이 아닌 곳에서 평범한 동물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짐을 싸서 습지로 내려왔습니다.
습지에 사는 동물들은 전갈이 자신들을 공격하러 온줄 알고 겁을 먹었습니다. 전갈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살고 싶어. 난 다른 전갈들과는 달리 공격적이지 않아.”라고 하며 그들을 설득했고 결국 개구리들도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이 개구리인양 그들과 평화롭게 잘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들이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풍을 가던 중 개울을 건너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전갈과 그의 절친 친구 개구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전갈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등에 태우고 좀 이 개울을 건네줘.”
그러자 친구 개구리는 그가 개구리처럼 살기는 하지만 개울을 건널 수 없는 자신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독침으로 나를 찔러서 죽일 거잖아.”
전갈은 말했습니다.
“바보야. 네가 죽으면 나도 물속에 빠져서 죽잖아.”
그렇게 하여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갈은 개구리 등 뒤에서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하는 전갈이고, 아무리 원해도 개구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결국 전갈은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때는 개인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나 오상의 비오성인의 예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처음에 프란치스코를 거지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고, 비오 성인이 오상을 받았을 때도 악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그가 신자들과 미사 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이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교회가 자신을 박해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선포되고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 막달레나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이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귀 들렸던 마리아나 사도도 아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기분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완고하여 믿음이 부족한 사도들을 꾸짖으십니다. 만약 꾸짖으시는 모습을 보고 마리아 막달레나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사도들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타나셔서 믿게 만드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증인이 되도록 소명을 주심을 또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나타나셔서 그 사람들에게 모두 사도들에게 알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본 것은 자신들이지만, 그들보다 먼저 뽑아 세운 사람들은 사도단이기 때문입니다.
뽑아 세웠다면 그 이유가 있는 것이고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뽑히지 않은 사람과 뽑힌 사람의 소명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로 살아야 하고 전갈은 전갈로 살아야합니다.
소명이 곧 존재입니다.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는 전갈이 될 수 없고 전갈은 개구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개구리 같은 성직자도 전갈로 태어나게 해 주셨다면 전갈인 것입니다.
세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면 새로운 소명을 부여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가 변하면 소명도 변합니다.
미국을 여행하던 아프리카 사람이 맑은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보고 탐이 나 그것을 떼어 아프리카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틀어보니 당연히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만들고 그 곳에 장치해 놓았다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단을 뽑아놓았다면 역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크게 성공한 한 사람의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보다 능력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도단 위에 교회를 세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뽑힌 이들의 영성이나 행위에 있지 않고 뽑혔다는 것 바로 그것에 있습니다. 일단 세례를 받으면 죄를 지어도 하느님의 자녀인 것처럼, 예수님께 꾸중을 들어도 교회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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