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요?
책은 교회의 기원과 성장에 관해 전해주는 중요한 책으로, 성령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어 ‘성령의 복음서’라고도 불리웁니다. 오늘날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르고자 열심히 공부하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누가 썼나요?루카복음서를 쓴 사람이 썼다고 봅니다. 신약성경 중에 머리말은 루카복음서(1,1-4)와 사도행전(1,1-5)에만 있는데, 그 머리말에 등장하는 수신인이 모두 ‘데오필로’(‘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사도행전의 머리말에 첫 번째 책에 관해 간략하게 요약되어있을 뿐 아니라, 루카복음서의 끝부분과 사도행전의 앞부분이 예수님의 승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두 책에 사용된 문체나 용어도 비슷합니다.
언제 쓰여졌나요?
루카복음서와 사도행전은 한 사람의 신학적인 의도 아래 두 권의 책으로 쓰여졌습니다. 그중에서 루카복음서가 80-90년경에 먼저 쓰여졌고, 사도행전은 대략 95년경에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사도/장로/부제 등 교계제도적인 모습과 세례/안수/성찬 등 원초적인 성사제도는 1세기 말엽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왜 썼나요?
사도행전은 기원후 30년부터 61년경까지의 초기 교회 공동체의 생활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저자의 주된 관심은 사도들이 아니며 그들의 생애나 행적도 아닙니다. 저자의 근본 관점은 예수님의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지 대략이나마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탄생에 이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이방인의 땅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를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근원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교회 구성원들에게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81-96년)의 황제숭배 강요 및 유다인과 이방인의 모함 등으로 시련과 박해를 받고 있는 현실에서 낙담하지 말고,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며 굳건한 신앙을 지켜 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사이의 빈부 차이 문제 및 유다계/이방계 그리스도인 간의 갈등 등 교회 내의 문제를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을 모범 삼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상과 베드로와 다른 설교가들의 설교를 통해 교회의 이상형을 제시하고 이방인 사도 바오로의 사도적 생애의 줄거리를 말해줌으로서 예수님의 마지막 예언이 실현되어 나가는 것을 제시해 줍니다. (예루살렘을 출발지로 하여 로마를 종착지로 구성함)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나요?복음이 전파되어 나가는 단계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1)예루살렘에서 최초로 탄생한 공동체의 생활(1,1-5,42)
2)팔레스티나 영내와 인접지역에 선교확장(6-12장)
3)바오로의 제1차 선교여행과 예루살렘 사도회의(13,1-15,35)
4)바오로의 제 2차, 제3차 선교여행(15,36-20,38)
5)바오로의 투옥과 소송. 그리스도를 위해 사슬에 묶여 로마에 당도하였으나 자유롭게 복음을 전함(21-28장)
바오로의 제1차 선교여행(45/46년-48/49년)주요 체류지 ☞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살라미스-바포-베르게-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이고니온-리스트라-데르베돌아오는 길 ☞ 데르베-리스타라-이고니온-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베르게-아딸리아-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바오로의 제2차 선교여행(49년-52년)주요 체류지 ☞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다르소-데르베-리스트라-이고니온-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트로아스-필립비-데살로니카-베레아-아테네-고린토-에페소돌아오는 길 ☞ 가이사리아-예루살렘-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바오로의 제3차 선교여행(53/54년-58년경)주요 체류지 ☞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다르소-에페소-트로아스-필립비-고린토-베레아-데살로니카-필립비-아쏘-밀레도스-띠로-예루살렘
바오로의 로마 압송 경로(58년-60/61년)
바오로서간
사도 바오로는 어떤 사람인가요?
사도 바오로에 대해 사도행전과 서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히브리인 부모를 둔 유다인이며,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바리사이에 속합니다. 그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 출신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그는 타르수스에서 익힌 그리스말과 많은 희랍식 사상과 철학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유다식 이름과 ‘바오로’라는 로마식 이름을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막 짜는 기술을 익혀 직업으로 가졌고, 스스로 일해서 생계유지를 할 수 있음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병약한 체질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의 성격은 급하고 다혈질적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가 보낸 편지들에 나타나는 문체는 박력이 넘치고 매우 강렬합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히브리 종교 문화권와 희랍 문화권, 그리고 로마 문화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교회박해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나 율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몰두한 사람인지라 당연히 율법을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편으로 여겼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 곧 예수를 믿으면 율법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그리스도교를 몹시 박해했습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율법을 비판한 예수는 “저주받은 몸”이지 결코 메시아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또 다른 이유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인의 신앙에 따르면 부활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일어날 미래의 사건이지 역사 한 가운데서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바오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는 스테파노를 돌로 때려죽이는 자리에서 다른 이들의 옷을 맡아주었다고 하며,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다마스쿠스 사건
바오로의 생애는 크게 다마스쿠스 사건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으나 그 사건 이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 극적인 체험을 통해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는 이 사건을 단지 몇 차례에 걸쳐 간결하게 언급했을 뿐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계시에 따른 것이고 자신이 한때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으나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자신에게 계시하신 후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방인 선교를 위한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세 번에 걸쳐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사건을 매우 극적으로 상세하게 소개합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바오로는 예루살렘 최고의회의 공문을 갖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후에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형제여러분, 만일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5,11)라고 묻고 “겉으로만 좋게 보이려고 한 자들, 그자들이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그리하는 것입니다”(6,
12)라고 단죄하였습니다.
‘할례’는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하여 자신들의 민족적 특권을 지키기 위하여 요구했던 마지막 보루였는데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하여 할례의 무익함을 깨닫고 그것을 과감히 철폐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세계적인 종교로 탈바꿈 시키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의 행적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다마스쿠스 교회를 방문하여 하나니아스를 만나 세례를 받고(22, 16) 유다 회당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했다고 합니다(9, 20~22).
그 후 바오로는 자신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장 아라비아(오늘날의 요르단 왕국)로 떠나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습니다(갈라 1, 16~17).
바오로가 아라비아로 간 목적은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그곳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러 갔을 것입니다.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바오로는 그곳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의 아레타스 임금의 총독이 자신을 붙잡으려 하자 광주리에 담겨 성벽에 난 창문으로 내려져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2코린 11, 32~33).
다마스쿠스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 동안 케파와 야고보와 함께 지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인 케파와 야고보를 만난 후 바오로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가서 한 동안(36~44년)선교했습니다.
한편 33년경 스테파노 부제 순교 후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로 도망쳐 그곳에서 유다인과 이방인들에게 선교하여 매우 좋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에 최초로 유다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혼성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보기 위해서 키프로스 출신 바르나바를 파견했는데,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머물고 있던 바오로를 데리고 안티오키아 교회로 가서 일 년 동안(44~45년)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인구 50만이 넘는 도시가 세 곳이 있었습니다. 제국의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였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유다땅이 아닌 이방 지역에 세워진 그리스도교 최초의 교회로 유다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인 혼성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가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선교여행을 할 때 언제나 안티오키아 교회를 출발지와 도착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붙여주었습니다.
1차 선교여행 (45~49년)
사도 바오로는 45~58년경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세 차례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그의 사촌인 요한 마르코와 함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32km 떨어진 셀레우키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동부 항구 살라미스와 서부 항구 파포스에서 선교했습니다.
다시 파포스 항에서 배를 타고 터키 남부 팜필리아 지방 페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선교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페르게에 도착해서 곧바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갔고, 이곳 회당에서 두 차례 안식일을 지내며 먼저 유다인들에게 선교했으나 배척당하자 이방인들을 상대로 선교했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유다인들의 방해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코니온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코니온에서도 유다교 회당에서 설교하는 기회가 생겨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며 죽이려 했기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리카오니아 지방의 리스트라와 데르베로 피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리스트라는 바오로가 2차 선교여행 때 제자로 삼은 티모테오의 고향입니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리스트라와 데르베에서 선교한 다음 선교한 지역들을 차례차례 거슬러 가면서 보살핀 후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 서쪽으로 16km 떨어진 아탈리아 항구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시리아 안티오키아로 귀환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49년)
49년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인 사도회의가 열렸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1차 선교여행을 한 후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회 안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교회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신앙만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유다교 율법준수까지 요구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사도회의가 열렸는데, 이 모임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고 있던 본토 유다계 사도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해외 유다계 사도들인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참석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 사항이 바오로가 직접 쓴 갈라티아서 2장1~10절과 루카가 기록한 사도행전15장 7~20절에 전해오는데 세부적인 결정사항에서 조금 차이를 보입니다.
갈라티아서 2장 1~10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두 가지 사항에 합의했습니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이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도들은 유다인들에게 선교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선교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사항을 결정한 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루살렘 모교회 신자들을 위해서 이방인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펴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사도회의의 결의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로부터 서서히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한편 사도행전 15장 1~2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 야고보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서로 평화롭게 지내도록 지침을 내립니다. 그 지침의 골자는 유다교를 거치지 않고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에 영입하는 일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만(사도 15, 19), 이방인들에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혐오하는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사도 15, 20).
곧, 이방인들이 할례 받을 필요는 없으나 율법의 몇 조항만은 지켜야 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여기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은 신전에서 제사 지낸 다음 장터에 내다 파는 고기를 가리킵니다.
불륜은 근친상간을 뜻하는데, 유다인들은 근친상간을 싫어했으나(레위18, 6~20), 당시 지중해 지역 이방인들 중에는 근친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유다인들에게 금기 식품이었습니다.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고, 이방인들은 형제애를 발휘해 유다인들이 싫어하는 일을 삼가달라는 지침입니다. 원칙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되, 부수적으로는 이웃사랑과 양보의 미덕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안티오키아 사건
안티오키아 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두 번째 교회로, 유다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인 최초의 혼성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 예루살렘 모교회의 으뜸 사도 베드로가 방문했을 때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사건이 경위가 갈라티아서 2장 11-14절에 전해옵니다.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닫느 말입니까?’”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있고 나서 베드로는 지중해 곳곳에 설립된 교회들을 두루 돌아보는 기회에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안티오키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다인들이요 또 일부는 이방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함게 모여 성찬을 거행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유다인이기는 했지만 두 부류의 신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좋게 여겨 손수 성찬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유다인의 음식 규정에 따라 유다인은 이방인과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그만 베드로는 겁을 먹고 몸을 사리며 이방인 신자들과의 성찬을 사양했고 바르나바를 포함한 다른 유다인들도 이에 동조하여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끊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었고, 이에 바오로는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이미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결정을 했으니 유다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2차 선교여행
사도회의가 끝난 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1차 선교여행 중에 입교한 신자들을 돌아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도 같이 데려가자고 했으나 바오로는 페르게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그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결국 바르나바와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고향 키프로스로 떠나고, 바오로는 실라스를 데리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육로로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두루 다니며 그곳 교회들을 굳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에 당도하였고, 그곳에서 유다계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그리스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티모테오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1차 선교지역을 두루 살펴본 다음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의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갈라티아 지방에서 갑자기 병이 생겨 요양을 하게 되었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갈라티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 지방으로 가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셔서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 항구로 내려가 교회를 세우고 선교했습니다. 바오로는 그곳에서 잠을 자다가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를 만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트로아스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이튿날 그리스 항구도시 네아폴리스에 도착했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네아폴리스에서는 선교하지 않고 그리스 북부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리피 교회를 세웠습니다. 필리피 교회는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입니다.
필리피 선교 말기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점귀신이 들린 하녀에게서 점귀신을 떼어 주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기회에 간수의 가족을 입교시키기도 했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필리피를 떠나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고 테살로나카로 가서 선교했습니다.(사도17,1) 바오로는 안식일에 유다교 회당에서 설교하여 많은 시민을 입교시켰으나 유다인들의 방해로 테살로니카를 떠나 올림포스 산중에 있는 베로이아로 피신하여 그곳에 혼성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테살로니카 유다인들이 베로이아까지 와서 선교를 방해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베로이아에 남겨두고 혼자 배를 타고 아테네로 가서 선교했으나 바오로의 설교는 아테네 도시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때 베로이아에 머물러 있던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아테네로 내려오자,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테살로니카 교회로 보내고, 바오로 자신은 실라스와 함께 코린토로 내려가 18개월동안 머물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안식일마다 유다교 회당에서 선교했습니다. 그리고 테살로니카로 갔던 티모테오가 돌아와서 그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자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회로 편지 한 통을 써 보냈습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먼저 씌어진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입니다.
바오로 일행은 코린토 선교를 마친후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데리고 켕크레아 외항에서 배를 타고 에페소와 지중해와 지중해변의 카이사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을 거쳐 선교 출발지였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갔습니다.
제3차 선교여행
바오로는 2차 선교여행 때 세웠던 갈라티아 지방의 교회들을 둘러본 다음 에페소로 내려가 무려 27개월 동안 머물며 선교했습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선교하고 또 한편으로는 보살피고 있는 여러 교회에 편지들을 써 보냈습니다. 바오로 자신이, 문이 활짝 열렸다고 말할 만큼 에페소에선 선교가 잘 됐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아르테미스신전 참배자들이 줄어들고 신전모형을 만드는 은장이들의 수입이 줄어들 정도로 바오로의 선교는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제자 에파프라스를 시켜 에페소 동쪽에 위치한 콜로새와 라오디케이아, 히에라폴리스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오로는 갈라티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 유다교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단자들이 설친다는 소식을 듣고 갈라티아서를 써 보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로 여러 통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0-13장이 전해옵니다. 또한 바오로는 에페소에 주둔한 로마군 부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필리피 교회와 콜로새 교회 신자인 필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에페소 감옥에서 석방된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9장을 써 보낸 다음 코린토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석달 가량 머물면서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총정리하여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오로는 장차 로마를 방문한 다음 스페인까지 가서 선교할 구상을 하였기에 자신의 신앙을 알리고자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입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휴가를 마친 후 필리피 교회로 가서 무교절을 보낸 다음 네아폴리스에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에서 육로로 아쏘스까지 걸어가서 아쏘스에서 배를 타고 밀레토스 항구에 다다랐습니다. 바오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 작별인사를 하면서 고별설교를 했고, 그 후 일행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로도스, 파타라, 티로, 프톨레마이스, 카이사리아를 거쳐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바오로는 아마도 예루살렘을 거쳐 선교 출발지였던 시라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당시 유다 총독부가 있던 카이사리아로 이송되어 2년 동안 미결수로 갇힌 몸이 되는 바람에 3차 선교여행이 끝나고 맙니다.
체포 ․ 구금 ․ 로마행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음 예수님의 동기 야고보를 만났는데 야고보는 바오로의 신변을 무척 염려했습니다. 바오로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선교하면서 유다교를 헐뜯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유다인들로부터 봉변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오로에게 유다교 율법에 따라 나지르인 서원을 했지만 돈이 없어 서약을 마칠 수 없는 이들에게 제사 비용을 대주라고 했습니다. 바오로는 야고보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레동안 정결례를 행한 후 서원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다가 그만 에페소를 비롯하여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바오로가 선교여행 때 유다교를 비방했으며 성전 안으로 이방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습니다.(사도27,17-29)
에페소 주변의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과 성전에 있던 다른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죽이려 했으나 성전 마당 북쪽 안토니오 진지에 주둔한 로마 군인들이 출동해서 바오로를 구해냈습니다.(사도21,31-36)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죽이려고 하자 안토니오 로마군 사령관인 천인대장은 바오로를 총독부 카이사리아로 압송케 했습니다. 바오로는 로마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밤에 예루살렘을 떠나 안티파트리스에 이르러 잠시 쉬고 이튿날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2년 동안 미결수로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바오로가 카이사리아 총독부에 도착했을 당시 그 곳 총독은 노예 출신의 안토니우스 펠릭스(52-60년)였습니다. 그는 바오로를 자주 불러 대화를 나누었으나 뇌물을 바라면서 두해 동안이나 재판을 미루었습니다. 그에 이어 포르키우스 페스투스 총독(60-62년)이 부임했는데 그 역시 유다인들의 요구에 따라 바오로를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했기에,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노라고 상소합니다.
페스투스 총독이 허락하자 60년 가을 바오로와 죄수 몇 사람은 율리우스라는 백인대장의 인솔로 카이사리아 총독부를 떠나 시돈에 입항하여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배를 타고 리키아의 미라로 갔습니다. 미라에서 배를 갈아타고 크레타 섬 남쪽 ‘좋은 항구’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시일이 흘러 속죄의 날 단식일이 지난 때라 항해하기가 위험하다는 바오로의 경고를 무시한 채 백인대장은 항해를 강행하다가 폭풍을 만나 파선하였고, 일행은 겨우 몰타섬에 상륙했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몰타섬에서 겨울철 석달을 지내고 61년 디오스쿠로이의 모상이 새겨진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 상륙한 다음 사흘을 머문 후 레기움을 거쳐 나폴리만에 있는 푸테올리 항구에서 하선하여 이레동안 그곳에서 신자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푸테올리에서 로마까지는 국도를 따라 걸었는데, 로마 신자들이 바오로 압송 소식을 듣고 아피우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내 고을까지 마중나왔습니다. 로마에서 바오로는 군인 한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만 이년동안 셋집에서 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모두 맞아들였고,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오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가 95년경에 쓴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1절-6장 1절을 보면 바오로가 에스파냐에 가서 선교하고 그 후에 로마로 돌아와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로마교회 신자들의 시샘과 싸움 때문에 바오로는 인내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는 일곱 차례나 결박당하고, 쫓기고, 돌을 맞으면서 동방과 서방에서 복음 선포자로 활약한 까닭에 자기의 믿음에 어울리는 고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바오로는 온 세상에 의로움을 가르치며 서방 끝(에스파냐)까지 가서 세도가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상을 떠나 거룩한 곳으로 갔으니 인내의 지극한 표본이라 하겠습니다.”(클레멘스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5-7)
교회역사가 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바오로는 로마 황제 네로 박해 때(64-68년) 순교했으며,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 테르툴리아누스는 네로의 박해 기간에 바오로가 세례자 요한처럼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바오로는 로마 남쪽 교외에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곳(트레 폰타네:지금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순교하고 로마 남대문 밖 성 바오로 대성당 터에 묻혔다고 합니다.
바오로서간은 어떤 책인가요?
신약성서 27권의 문헌 중 13권(히브리서를 포함해서 14권)이라는 많은 양이 바오로 사도의 서간입니다.
바오로의 서간들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문헌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하는 복음서들이 오랜 구전과정과 복음사가들의 편집과정을 거쳐 전해지고 있음에 비해 바오로의 서간은 이러한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가 형성됨에 있어서 바오로의 가르침은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거쳐 제국의 수도 로마에까지 전파함으로써 장차 교회를 세계적 교회가 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성사적으로 볼 때 바오로의 삶과 가르침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예-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회개).
교회일치적 측면에서도 바오로의 서간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기본적인 성경적 근거가 바로 바오로 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썼나요?
바오로의 친서가 확실시되고 있는 서간들
-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둘째 서간
-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친저성에 의혹이 있는 서간들
-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둘째 서간
- 티토에게 보낸 서간
확실히 바오로의 서간이 아닌 서간
-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어떤 형식으로 쓰여 있나요?
서두에 발신인의 이름, 수신자, 그리고 인사로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인사와 더불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말과 수신자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내용은 주로 수신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교의를 설명하고 윤리적인 훈시를 담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바오로는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 결코 직접적으로 맞서지는 않고 역설적인 방법과 성경의 예를 들어 부드럽게 신자들의 마음에 참 신앙을 호소합니다.
후반부에는 강경한 어조로 반론을 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교훈적으로 권고합니다. (실제적인 삶의 지침을 제공)
말미에는 마지막 인사와 축복을 빌고, 자신과 함께 있는 이들의 안부와 자신의 개인적인 안부를 덧붙이기도 합니다.
왜 썼나요?
바오로는 선교 여행을 통해 각지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공동체에만 지속적으로 머물 수 없었고 각 공동체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방문할 수 없었기에 각 공동체에 많은 서간을 보냈습니다.
각 공동체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구두로 또는 서간으로 바오로 사도에게 알렸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바오로도 서간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서간은 그리스도교의 선포 내용 전체를 신학적으로 집대성하여 요점을 정리해 둔 것이 아니라 개별 공동체들이 처한 상황과 문제에 맞추어 기회가 닿는 대로 쓰여진 짧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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