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특강(복음서)
신약성경의 역사적 배경
예수님 당시 지중해 일대는 로마 제국의 점령 하에 있었다. 팔레스티나는 기원전 63년경에 로마 제국에 점령되었다. 에돔(이두메아인)의 혈통을 이은 헤로데는 BC 37년경부터 유다의 분봉왕으로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았고, BC 20년경부터 예루살렘의 재건과 증축공사를 시작하였다. BC 4년 헤로데가 죽은 뒤 그의 세 아들(아르켈라우스, 헤로데 안티파스, 필립포스)은 나라를 3분하여 각기 이어받았다.
아르켈라우스는 이두메아,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를 차지했는데, 당장 폭군의 정체를 드러내 국민은 견디다 못해 기원 후 6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탄원을 올렸다. 황제는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를 귀양 보냈다. 그때부터 이 지역은 총독을 파견하여 로마가 직접 다스렸다. 총독은 지중해 연안 도시인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에 상주하였다. 히브리인 대축일들이 다가오면 총독은 갑자기 백성이 대거 운집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직접 도시의 치안을 다스렸다. 기원 후 30년 파스카 축제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본시오 빌라도 총독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기원후 26-36년까지 팔레스티나 총독으로 재임했던 인물이다. 유다인들이 질투 때문에 예수님을 체포하여 선고를 내린 뒤 그에게 끌고 와서 사형선고를 내리게 만든다. 당시 유다인들의 자치적 결정은 로마 당국의 재가가 없으면 효력을 발생치 못했기 때문이다.
34년에 필립포스가 죽은 뒤, 그가 다스리던 영지도 로마 총독 관할로 귀속된다. 39년에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파면을 당하고 그의 영지도 총독 관할이 된다. 41년부터 44년까지 팔레스티나는 헤로데 아그립바 1세의 통치를 받는다. 그는 대 헤로데의 손자였다. 이 인물에 관해서는 사도행전(12장)에도 이야기가 나오는데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거슬러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그때 요한의 형 사도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도 투옥되었다.
아그립바가 죽자 팔레스티나는 다시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고, 이 상태는 유다 반란(66년)과 예루살렘의 파괴(70년)까지 계속되었다. 예루살렘은 베스빠시안이 지휘하는 로마 군대의 공격을 받았고 그 인물이 로마 황제로 추대되자(68년) 그의 아들 띠뚜스가 군대를 지휘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도시를 영원히 폐허로 만들었다.
신약성경의 지리적 배경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의 지리 변천사를 다음 몇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가. 헤로데 대왕 시대는 팔레스티나 전역이 한 사람에 의해 통치되었다.
나. 헤로데 대왕이 죽은 뒤에는 이 지역이 그의 아들들에 의해 3개 지역으로 분할 통치되었다.
다. 기원후 6년 남부지방(유대아, 사마리아)은 로마 총독 관할지역이 되었다.
라. 헤로데 아그립바1세 재위중인 41-44년에는 다시금 전 국토가 통일 관리되었다.
마. 헤로데 아그립바1세 이후 팔레스티나 전체가 다시 로마 총독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이 상태는 사실상 70년까지 계속됨)
유다인들의 거주지역별 분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방
가난한 산간 지방이었으나 신앙을 엄중히 지키는 주민들이 살았다.
사마리아 지방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가 북부 이스라엘을 점령한 이래로 이곳에 이주해 온 아시리아 민족과의 혼혈인이 많았으므로 유다인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경멸하고 증오하기까지 하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면서 동시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 자들이었다. 이 사마리아 지방은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사이에 있었다.
갈릴래아 지방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으로서 북부는 산악지대이다. 주민은 여러 민족으로 혼합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기원전 8세기부터 아라메아인과 페니키아인들이 들어와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희랍시대에는 셀레우쿠스 왕가의 지배를 받다가 시몬 마카베오 때부터 다시금 유다에 귀속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1세기에는 이방 주민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였다. 예수님 시대에는 주민들의 대다수가 아브라함과 모세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충실히 지켜왔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매주의 안식일 집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 한편 이웃 나라들과의 교류가 빈번하여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라는 말도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활동은 바로 이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다.
해외로 이산된 유다인
디아스포라라고 불리는 유다의 이산민들은 주로 지중해의 중요 항구들에서 살았다. 그 중에서 에집트의 알렉산드라 지역에 많았다. 이들은 각기 살고 있는 거주지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신앙을 충실히 지켰으며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 관용주의를 표방한 해외거주 유다인들은 훨씬 쉽게 그리스도교를 받아 들였으며 훗일 선교활동의 거점을 제공하였다.
신약성경의 문화적 배경
헬레니즘
헬레니즘이란 그리스의 문화사상으로서 유다인의 문화, 종교사상인 유다이즘과 더불어 유럽문화에 큰 영향을 준 사상이다.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의 세력으로 지중해 연안에 만연된 헬리니즘은 당시 유다를 지배한 에집트 및 시리아의 통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다사상을 헬레니즘화 하기 위해 강압적인 통치방법을 쓰고 성전을 모독한 사건(기원전 169)은 유다인들로 하여금 마카베오 일가를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 결과 유다는 잠시나마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하스모네 왕조의 정권다툼은 기원전 65년에 이미 시리아를 점령한 로마의 개입을 불러 들였다. 이를 기회로 로마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다인들의 종교적 특권만을 인정한 채 속국으로 만들었다.
헬레니즘의 주요 공헌은 무엇보다도 로마제국의 언어를 희랍어로 통일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희랍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빠르게 효과적으로 '세상 끝까지' 선포될 수 있었다. 또한 헬레니즘은 진선미를 추구하고 여러 지방의 문화와 종교를 탐구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교의를 쉽게 받아들이게 했다.
유다이즘
유다이즘은 유다 공동체의 모든 생활양식을 총칭하는 것으로 유다교와 동일시된다. 유다이즘의 기원은 멀리 아브라함 등 성조들에게까지 소급되지만 보다 의미있는 시작은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해방체험과 시나이산 계약 및 모세의 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유다이즘은 판관시대와 왕정시대의 근간을 이루며 변화 발전되어 오다가 바빌론 유배시대와 유배이후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체제 곧 유다교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메시아 희망, 구원의 길을 제시한 율법 준수 등이 특징인 유다이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 들이지 않고 구약성경과 전통만을 열성적으로 고수한다. 그러나 구약성경, 유일신에 대한 희망, 구원추구, 소수의 믿는 자들의 가치, 섭리에 관한 믿음과 종말에 관한 희망 등 유다이즘의 긍정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고 마지막 날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장소로 확신하였다. 이 성전에서는 대사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제관들과 레위인들이 엄격한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사제는 유다의 최고 권위자로서 고위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와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최고의회(산헤드린)를 주재하였다.
또한 예수님 시대에는 마을마다 회당(시나고가)이 있어서 유다인들은 이곳에 모여 기도하며 율법의 낭독과 그 해석을 들었다. 이 율법의 주석가들을 율법학자라 불렀는데 이들은 민중들에게 큰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으나 사제 계급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예수님 시대의 파당
사두가이 -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존의 귀족들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는 고위 제사장들 그리고 부유한 재산가들이었다. 그들은 매우 실리적인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현재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류의 통치자건 상관없이 타협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숭상하고 하스모네 왕가 및 후에 등장하는 로마 정권과도 결탁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교란 상태나 변혁이었다. 오늘날의 기득권층이 바라는 바와 다를 바 없다. 후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한 것도 바로 변혁을 두려워했던 이유에서였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된 율법의 계율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부활, 천사, 사후의 상벌문제,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니 합법적인 성전기구의 감독 하에서 제사를 엄숙하게 드리는 것 그리고 의식과 제물봉헌에 관한 규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런 이유로 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리사이 -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철저히 배격하였다는 점에서 사두가이파와 구분된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 어떤 종파보다도 지나치리만큼 엄격했다. 그러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모세의 율법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구전된 율법을 그대로 전승하며 발전시켜나갔다. 후에 이것은 미쉬나로 편찬되었고, 결국에는 탈무드로 집대성되었다. 잠깐 미쉬나와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하면, 기원전 3백 년부터 서기 5백 년까지 유다교 랍비들에 의해 구두로 전해져 구전율법을 탈무드라고 하는데 중심 본문은 미쉬나, 이 본문의 몇 배 분량의 주석 부분은 게마라라고 한다. 탈무드는 유다인의 종교 및 모든 생활 전반에 관한 가르침인데 성문율법인 구약성경과 함께 바리사이파에 의해 주도된 전통 유다교의 경전이라고 한다. 바리사이파들은 사두가이파와 달리 부활신앙, 사후의 상벌, 천사와 같이 새로 도입된 개념들을 받아들였다. 또한 다른 점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상류층에 속한 이들이라면 바리사이파는 주로 평신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도덕적으로 성실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얻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실제로 유다교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율법의 틀에 매여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순을 야기 시켰기에 예수님께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율법학자(랍비)들과 바리사이파는 동일한 사람들을 인가?
둘은 명확히 구분되는 말이다. 단지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이 율법학자들이었고 많은 율법학자들이 바리사이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런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당시 사두가이파 율법학자와 같은, 바리사이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율법학자들도 있었다. 바리사이파 구성원들을 보면, 소수의 율법학자와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상층계급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외 대다수는 평민들이었다. 바리사이파라고 모두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비록 율법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할지라도 율법에 헌신적인 사람들로서 바리사이파적인 정결례와 십일조 의무를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으며, 이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는 대다수의 민중들을 업신여겼다. 그와 같은 율법학자들의 허영심과 명예욕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은 예수님께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았다.
에쎄네파 -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들이 전해 내려오지만, 에쎄네파에 대한 기록은 얼마 전까지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사해 근처 동굴에서 ‘꿈란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에쎄네파에 대한 상당 부분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에쎄네파의 지도자는 단지 ‘의로운 스승’이라는 별명만으로 전해지지만, 대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맡아 드려왔던 사독계열의 대제사장 출신이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은 하시딤파(경건주의자들) 일원으로 민중봉기에 참여했지만 요나단이 사독계열 가문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직을 차지한 것을 인정할 수 없어 극한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반발은 통치자의 가혹한 박해로 이루어졌고, 결국 에쎄네파의 지도자는 박해를 피해 소수의 추종자를 데리고 사해 근처 꿈란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들을 두고 ‘꿈란 수도자’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에쎄네파 사람들은 바리사이파보다 더 엄격히 율법을 지켰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세상과 분리된 채 극히 제한된 교류만을 유지했다. 묵시문학적인 종말론, 율법중심의 근본주의, 선민주의적 배타의식, 이런 점들이 당시 에쎄네파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세리 - 신약성경 안에서 이 단어는 세금을 부과하고 거두어들인 세금을 관리하는 관리가 아니라, 당국자들로부터 세금 징수를 청부 맡은 사람, 곧 세금징수원을 지칭한다. 이들은 당국자들(로마관리 또는 지방 영주)과 계약을 맺어 일정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거두어들일 세금의 액수를 정하였는데, 세리들은 많은 경우에 정한 액수보다도 많이 거두어들인 후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세리들은 이방인 지도자들과 협력하는 것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던 처지였는데, 이런 부정까지 저지르곤 하였기 때문에 일반 유다인 백성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았으며 거의 ‘공적인 죄인’ 취급까지 받았다고 한다.
복음서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재 복음서들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순서로 되어 있으나, 이런 순서는 그리스도교 초기 교부들이 마태오 복음서가 가장 먼저 아람어로 씌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람어로 씌어진 마태오 복음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네 복음서들이 편집된 실제 연도를 감안하면 마르코 복음서가 가장 먼저 씌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서기 70년경 마르코는 입으로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수집하여 사상 처음으로 마르코 복음서를 펴냈다.
복음서의 형성과정
기원후 30년에서 70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커지자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전승과 가르침에 대한 정통성의 의문이 제기되었다. 즉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구두전승이 쓰여지고 엮어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전승에는 3단계가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구전의 단계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그 분의 행적과 사건들이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깨닫고 그 분에 대한 신앙이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사도들의 선포 내용이며 신자들의 신앙 내용이었다.
② 문서로 기록되는 단계
최초의 제자들도 죽어가고 곧 도래하리라 믿었던 종말과 심판이 지연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 세상 안에서 더 확고히 보전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신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또 로마의 교회에 대한 박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문서의 필요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서의 필요성에 따라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모아서 기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③ 신약 성경의 완성 단계로 편집 단계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게 하고 그 믿음 가운데서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목적은 이미 전해져 오고 있는 기록들을 가지고 그 당시 공동체의 필요성에 의해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적, 교육적, 신앙적인 내용으로 편집하는 것이었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전기나 교회의 역사를 적은 것이 아니라 선교, 교육, 신앙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만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들이 늦어진 이유
① 팔레스티나에서 복음이 선포되던 단계에서는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② 입으로 선포되는 생생한 말씀에 더 중요성을 두었다.
③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렸다.
네 복음서의 상징
마태오 사람, 마르코 사자, 루카 황소, 요한 독수리
네 복음서에 이런 동물의 상징이 붙은 이유는 이레네오(2세기) 성인이 에제키엘서와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복음서와 연관지어 해석했기 시작했고, 예로니모 성인(4세기)이 이것을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얼굴 형상은 사람의 얼굴인데, 넷이 저마다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고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었으며 독수리의 얼굴도 있었다.” (에제키엘서 1장 10절)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요한묵시록 4장 7절)
마태오 / 사람 - 예수의 인성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
마르코 / 사자 - 복음서의 서두가 사자의 울음처럼 세례자 요한의 장중한 외침으로 시작되기 때문.
루카 / 황소 - 황소는 주로 제사에 바치던 제물이었는데 루가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하는 제사로 묘사했기 때문.
요한 / 독수리 -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예수의 신성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
공관복음
복음서의 처음 세권을 공관복음이라 일컫는데. 이 명칭은 그리스어로 즉 함께 봄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이 첫 세복음서는 그들이 사용한 자료가 비슷하여, 서로 비교 대조할 수 있를 정도로 병행적인 것이다. 그들이 수집하여 엮은 자료들의 유사성과 상이성으로 말미암아 소위 공관복음 문제가 야기된다.
1. 유사점
내용 : 전체적으로 볼 대 첫 세복음서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공관 복음서에서 공통된 자료들을 특히 삼중전승이라 부른다. 이에 비해 이중전승은 두복음서끼리 유사한 전승을 말하고, 단일전승은 각 복음서의 유일한 전승(고유전승)을 일컫는 말이다.[마르코 복음서 총 절수-661절//중 6백여절이 마태오 복음서에, 350여절이 루카 복음서에 공통으로 수록][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240여절이 공통으로 수록(마르코에 없는 부분)][마태오, 루카에만 각각 수록된 고유한 이야기나 말씀-60여편]
배열 : 예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비슷한 형태로 묘사된다. 세례자 요한의 출현, 예수의 세례와 유혹의 광야 체험, 공생활 시작, 예수 활동의 대부분이 갈랠래아와 그주변. 그분의 예루살렘 여행과 재판 등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모든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 결론은 맺는다. 공관복음은 민중에게 행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서술과 예수를 둘러싼 인상을 표현하였다. 공관복음에 특징적으로 요한복음과 구별되는 점은 비유의 수집이라 할 수 있다.
2, 상이점
내용 : 어떤 사건들은 두 복음사가들만 전하고 있고, 다른 사건들은 한 사람만 전하고 있다. 두 복음사가가 전하는 같은 사건이라고 해도, 그 상이점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의 유년사화를 전하는 반면 마르코는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의 족보도 마찬가지이지만, 마태오와 루카 사이에서도 현저한 차이점이 보인다. 예수의 유혹 장면도 마태오와 루카에 의해 전해지지만 그 순서는 다르다. 부활보고에 관한 묘사도 같은 전승에서 취했다고 볼 수 없다.
배열 : 복음순서에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일치한다고 보지만, 상이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복음사가가 한데 모아둔 것을 다른 사가는 여러 곳에 산재하여 기록한 예도 있다. 비유사화는 각 복음사가가 보유하는 숫자도 다르다. 루가와 마태오가 마르코에 없는 예수의 말씀을 많이 전하고 있다 해도, 각기 다른 식으로 전한다. 마태오에서는 예수의 말씀들을 5개의 큰 설교로 나누어 모아둔 반면, 루카는 이 자료들을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긴 여정에 위치한다. 공관 복음서의 상이점으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주님의 기도와 행복론이다.
3. 해결책
① 구두 전승 - 공관복음의 해결책을 위한 가장 적절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두 전승은 기록 텍스트의 유사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② 이원천설 - 마태오와 루카가 비록 독립적이긴 하지만, 마르코 복음과 그보다 앞선 희랍어 원천(Q문헌, 예수 어록)을 토대로 쓰여졌으며 각기 고유 원천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마태오 복음서는 어떤 책인가요?
신약성경 27권 중 첫 번째로 나오는 성경이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의 말씀과 교회공동체를 위한 설교를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활 규범으로서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책이다.
누가 썼나요?
리용의 주교 이레네오(130-200년경)는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60-130년경)가 남긴 기록을 따라 첫 번째 복음서가 사도 마태오에 의해 쓰여졌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늘날 사도 마태오가 스승 예수에 관한 복음서를 집필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태오 복음서는 Q문헌(예수의 어록)과 마르코 복음서를 참고하여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이 확실한데, 예수의 직제자(直弟子) 마태오가 썼다면 그렇게 했을 리 없다는 거다(마태오 복음서에는 마르코 복음서를 그대로 이용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편의상 마태오라 부르고 있다.
누구를 위해 쓰여졌나요?
유다교의 여러 풍습이나 계율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간혹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풀이해주는 것으로 보아(마태 1.23;27,33.46). 북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에 인접한 시리아 지방(그리스어 사용)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본다. 공동체가 점차 유다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방인들에게로 열려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유다교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내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바탕을 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일깨우고자 쓰여졌다.
언제 쓰여졌나요?
50-60년경에 쓰여진 예수의 어록과 70년경에 완성된 마르코복음서를 참조하였다는 점, 교회의 발전을 고려하고 있는 점, 유다교와의 거리감이 생겨난 점, 100년경에 쓰여진 디다케(12사도의 가르침)에 마태오복음서가 인용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대략 80-90년경에 쓰여졌다고 본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나요?
마태오 복음서는 모두 28장이다. 다섯 편의 설교(5-7장;8-9장;10장;13장;18장)를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짜임새 있게 전해 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는 내용에 따라 크게 ‘예수란 누구인가’와 ‘교회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두 주제에 맞추어 살펴볼 수 있다.
마태오 복음의 신학적 특징
① 마태오 복음은 긴 설교집이 실려 있다. 다섯 편의 설교집은 그리스도교의 토대를 이루며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첫번째 교리서이다.
② 구약성경의 예언 성취,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성취됨을 보여준다.
③ 마태오 복음은 교회라는 부활 이후의 명칭을 기록한 유일한 복음서이다. 마태오는 교회의 두 가지 측면, 즉 세상의 모든 민족을 향한 공동체의 점진적 운동 방향과 공동체 내의 사목적 주체를 강조한다.
④ 마태오 복음은 베드로의 위치를 강조하면서 그의 바위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마르코 복음
마르코복음서는 어떤 책인가요?
마태오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성경이다. 예수의 말씀과 활동에 관해 처음으로 쓰여진 복음서로 다른 복음서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다. 감추어진 ‘메시아 비밀’이 예수의 행적과 십자가 죽음, 부활 안에서 서서히 밝혀지는 생생한 예수 사건의 증언록이다.
누가 썼나요?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60-130년경)가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마르코는 베드로에게 들은 내용을 충실하게 기록했다‘고 말한 것과 신약성경에 나온 말 등(사도12,12.25;필레 1,24;골로4,10;2디모4,11;1베드5,13)을 근거로 바울로의 협조자요. 베드로의 통역이던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했다는 설이 나왔다. 그러나 편의상 마르코를 저자로 부를 뿐 누가 복음서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히브리어와 아랍어, 유다인의 풍습과 이방인의 풍습을 잘 알고 있음을 볼 때 해외문물을 익힌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있다.
언제 쓰여졌나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13장의 내용에 비추어 기원 후 70년경으로 보고 있다. 유다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에 맞서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66년-70년경) 실패하고 70년에는 예루살렘마저 함락된다. 이 본문이 예언인지 아니면 일어난 일에 대한 보도인지에 따라 전후로 조정되고 있다.
누구를 위해 쓰여졌나요?
팔레스티나가 아닌 외국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생각하며 쓰여졌다고 본다.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리스어로 그 뜻을 풀이하였고 유다인들의 관습과 팔레스티나 지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11,17)이라하고 시로페니키아 여인(7,28)이나 백인대장(15,39)을 신앙인의모범으로 내세우는 등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나요?
마르코복음서는 모두 16장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1,1)의 기쁜 소식이 역사적인 인물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선포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밝혀지는 메시아비밀, 수난예고에 이어지는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 복음서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예수의 수난은 예수가 누구인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한지 되새기게 한다.
마르코 복음의 신학적 특징
① 마르코는 예수의 전기를 쓰려 하지 않았다. 마르코 복음은 역사적으로나 전기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간소하게 구성되었다. 마르코의 의도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한 예수의 일관성있는 여정을 보여준다.
② 마르코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려했다. 칭호는 거의 예수의 메시아성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메시아상을 보여주는 칭호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실 분,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등이다. 또 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과 위력을 계시한다. 기적을 통해 메시아적 권능을 나타냄. 즉 그리스도를 악마에 대항해 이긴 승자로 소개한다.
③ 메시아 고백을 꺼리신다. 당시 환경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오해의 소지(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해방자요 메시아로 기대)가 있었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만 완전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가 누구라고 알아본 악령들에게나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까지도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공개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④ 예수의 메시지는 임박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결단 요구였다. 그의 선포 내용은 당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해 계속되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 자체가 신비이므로,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고 비유적인 활동(구마기적과 치유활동은 결국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요 악에 대해 승리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체를 알려주는 상징인 것이다)으로 이 나라의 신비를 계시해 주셨다. 이 신비의 열쇠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즉 예수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근본적인 관건이다.
⑤ 마르코 복음 처음부터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조짐을 보여준다. 어쩌면 모든 것이 예수의 수난을 준비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여정은 당신의 고통받는 종으로서의 운명을 확연히 드러내주신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루카 복음
루카 복음서는 어떤 책인가요?
마르코 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성경이다. 공관복음서 중 세 번째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서나 마르코 복음서에 없는 내용(루카의 특수 자료)을 꽤 많이 담고 있어 예수의 행적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전해 준다. 특별히 ‘소외 받는 이들의 복음서’라 불리는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찬미와 기쁨, 희망과 평화의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다.
누가 썼나요?
무라또리오 경전목록(180년경 로마에서 쓰여짐)과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130-200년경)는 바울로 서간에 나오는 바울로의 협조자인 의사 루카(골로4.14;2디모4,11;필레1,24)가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썼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복음서를 쓴 사람이 사도행전도 썼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도행전에서 루카가 전하는 바울로와 바울로 서간에서 바울로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울로의 모습과 활동 내용이 무척 다르다. 다만 편의상 루카라고 부를 뿐이다. 그리스-로마의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고(머리말1,1-4) 그리스어 문장력도 뛰어나지만 팔레스티나의 지리와 유다인의 풍습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을 보면 저자가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언제 쓰여졌나요?
50-60년경에 쓰여진 예수의 어록(Q문헌)과 70년경에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를 참조해서 80-90년에 쓰여졌다고 본다. 유다의 독립 전쟁이 실패한 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짓밟히는 상황을 다른 복음서에 비해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어(21,20-24) 집필의 상한 연도가 70년보다 빠르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하한 연도 또한 93년경에 쓰여진 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서와 무관한 것으로 보아 90년경으로 잡는다. 그래서 대체로 80-90년경에 쓰여졌으리라고 추정한다.
누구를 위해 쓰여졌나요?
이방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 이스라엘의 지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바꾸어 전하는가 하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도 그리스어로 쓰여진 칠십인역(LXX)을 따르고 있다. 이를 볼 때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위해 쓰여진 것 같다. 특히 집필 대상과 내력, 동기 등을 밝히는 머리말(1,1-4)에서는 예수 사건을 직접 목격한 이들에게서 전해 받은 그대로 엮음으로써 이미 그리스도교에 대해 어느 정도 배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 책이 쓰여졌다고 밝히고 있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나요?
루카 복음서는 모두 24장이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를 정점으로 구원이 준비되는 구약과 구원이 이룩되는 신약(예수의 시대와 교회의 시대: 교회의 시대는 사도행전에서 이야기한다)으로 구원의 역사를 구분하고 있는 루카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여정을 따라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다.
루카 복음의 특징
① 루카 복음은 기쁨과 평화와 희망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② 이 기쁨의 바탕은 만민을 위하는 하느님의 선함이다. 루카는 만민을 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한다.
③ 만민을 위하는 하느님의 선함과 자비는 결코 일반 사면이 아니다. 그의 자비는 위선과 이기주의와 자신의 참을성을 악용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매순간이 은총이다. 아버지의 집을 등지고 떠나서 저지른 잘못이 무엇이든지 개의치 않고 오로지 돌아오기만을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아버지이다.
④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여성에게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⑤ 루카는 어느 복음서 저자보다도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교 사상, 기도에 대하여 중요한 논거를 강조했다고 본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서는 어떤 책인가요?
루카 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성경이다. 세례에서 부활까지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전해 주는 복음서이지만,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가)와는 다른 내용이 많으며, 문체도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있다. 특히 깊은 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예수 스스로 당신이 누구이며 어떤 분인지, 하느님과는 어떤 관계인지를 직접 밝히는 부분이 많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복음서이다.
누가 썼나요?
복음서는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한 것으로서 그 내용이 참되며, ‘예수의 사랑 받는 제자’가 이 책을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21,24). 또한 이레네오(리옹의 주교,130-200년경)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뽈리까르뽀(스미르나의 주교,69-155년경?)의 이야기를 빌어 ‘예수의 사랑 받는 제자’를 사도 요한이라 하고, 그가 네 번째 복음서를 집필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이 ‘예수의 사랑 받던 제자’는 사도 요한이 아니며 복음서를 집필하지도 않았다고 보지만, 그는 예수의 예루살렘 활동상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1세기 말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여겨졌다. 이 ‘예수의 사랑 받던 제자’의 영향을 받아 그를 따르던 이들이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복음서를 썼다고 본다.
누구를 위해 쓰여졌나요?
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유다적 분위기와 유다인들과의 대립을 보면 이 복음서가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위해 쓰여졌다고 보여진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를 모태로 출발하였지만 예루살렘 멸망 이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다인들의 박해가 더욱 심해졌다. 또한 영지주의(이원론적인 시각 아래 영과 육을 구분하여 영적인 것만을 중요시하는 사상)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신적인 면만을 강조하면서 예수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교회 내적으로도 혼란이 일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복음사가는 유다인들에 의해 박해받고 있는 자신의 공동체(편의상 요한공동체라 부른다) 성원들에게 믿음을 북돋워 주고, 영지주의로 말미암은 혼란을 바로잡고자 복음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요한공동체가 위치한 지역은 주로 소아시아의 에페소라고 보지만,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
언제 쓰여졌나요?
이집트에서 발견된 요한복음서 일부는 지금까지 발견된 요한복음서 중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125년에 쓰여졌음이 밝혀졌다. 이는 요한복음서가 늦어도 125년경에는 이집트에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 주는데, 이를 보면 요한복음서가 100년 이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요한복음서 저자가 공관복음서 중 적어도 마르코복음서를 알고 있었던 점,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다인들이 율법 준수를 강화하면서 회당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강력히 추방하고 있음을(9,22;12,42;16,2) 알고 있었던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대략 90-100년경에 쓰여졌다고 본다. 1-20장이 먼저 쓰여졌고, 21장은 후대에 덧붙여졌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나요?
요한 복음서는 모두 21장이다. 머리말(1,1-18),일곱 표징을 중심으로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전하는 ‘표징의 책’(1,19-12장),때가 되어 수난하시고 부활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광의 책’(13-21장)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요한복음의 특징
네째 복음서는 공관복음의 세 편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① 요한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모두 알고 있던 바를 반복해서 복음서를 쓸 생각은 없었다. 요한은 공관복음서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의 깊은 영상(影像)과 그 보완적인 측면을 기억해서 되살리려고 애썼다.
② 요한복음은 예수의 인품에 대한 진리를 ‘심화’시키고 보완한다.
③ 요한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일치와 형제애에 못지 않게 일반적으로 본 ‘이웃사랑’을 강조한다. 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바깥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폐쇄사회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④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 계심으로써 인간들의 양심은 필연적으로 혼란을 빚고 ‘근본 결단의 기준’에 서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분의 말씀 앞에서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어느 부분을 보류하거나 배척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보류가 없이, 전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하한 관습과 사고방식과 학문, 심지어 모세 율법까지도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 지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⑤ 언뜻 보면 요한의 복음서는 상당히 인격주의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인간 각자가 그리스도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런 관점도 옳기는 하나 전부는 아니다. 요한은 어디까지나 ‘교회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신도들을 상대로 하여 복음서를 썼다. 실상 요한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 (14,6) 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해주는 ‘근본 예식’이 곧 교회라고 제시되어 있다.
신약성경 비평방법
① 본문비평
많은 필사본들을 근거로 원전에 가까운 성경 본문을 찾아내는 것이다. 본문비평의 원칙으로 내적기준과 외적기준이 있다. 내적기준은 짧을수록, 어려울수록, 거친 문맥일수록 원문에 가깝고, 필사의 경향, 문체, 어휘, 문학적 맥락 등을 고려한다. 외적증거는 연대와 특성, 필사본의 증거의 지리적 분포, 같은 계통과의 관계 등의 문제를 살펴본다.
② 역사비평
성경 안에서 묘사된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과 중요성, 저자의 시대성과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 등을 알아내고, 저자 당대의 역사적 사건과 비교하고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일시에 지었는지 혹은 오랜 기간 동안 재고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정착되었는지 파악한다. 내적으로 성경 텍스트 안에 묘사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을 검토하고, 외적으로 성경문헌이 탄생한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을 취급한다.
③ 문법비평
성경본문을 의미단위로 재조합함으로써 그 의미를 밝히고 본래적인 의미와 언어학적 사용의미를 함께 고려함으로써 이해를 시도한다. 각 단어는 사상과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기본 단어들이 모여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는 것이다.
④ 문학비평
텍스트의 세계를 인정하고 텍스트 안에서의 전후 맥락에 비추어 본문이 지니는 참된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다. 텍스트 안에 묘사된 문학적인 요소, 예술적인 구성과 구조, 문체 스타일 등을 연구한다.
⑤ 원천비평
성경본문 안에 여러 원천이 사용되었음을 밝혀낸다. 문체가 바뀔 때, 단어선택이 다를 때, 저자가 전달하고자 했던바가 끊어질 때, 신학적 사상이나 관점이 다를때, 동일한 자료의 반복일 때, 다른 유니트와 별개로 볼수 있는 연대기적이고 사실적인 요소가 독립될 때 등으로 초기 자료를 구분해 낼 수 있다.
⑥ 양식비평
텍스트의 세계에 더 깊숙이 들어가서 각 단원과 대목의 문학적 장르를 규명하고 텍스트의 기능을 전체 안에서 파악한다. 또한 그 텍스트가 발생된 상황, 즉 삶의 자리도 고찰한다.
⑦ 전승비평
성경이 문서화되기 전에는 오랜 기간 동안 구두로 전승되었다. 그러한 자료들이 정착될 때는 나름대로의 배경을 가지게 된다. 성경 텍스트가 지니는 배경을 알고, 다른 여러 단계를 거쳤다는 사실을 아울러 구별할 필요가 있다.
⑧ 편집비평
양식비평과 전승비평을 전제를 하고, 몇 단계를 거친 끝에 정착된 최후 문서의 최종편집을 토대로 분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전승이 세대를 거쳐 내려오는 단계적 변화, 즉 그 텍스트의 양식, 내용, 기능을 마지막 편집단계에서 거슬러 재조명해 보는 것이다. 또 최종편집자의 신학사상과 기술을 토대로 전달하고자 추구했던 바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방법론이 연속성을 거슬러 분석하는 통시적 분석법이다.
다음은 예술작품이나 문학작품처럼 일단 저자의 손을 떠나면 작품 그 자체가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드러낸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대두된 방법론이 공시적 분석법으로서, 본문을 대하는 독자에게 주는 텍스트 의미를 알아내려는 것이다.
① 구조주의적 방법
저자의 의도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배경도, 일단 작품이 저자로부터 독립될 때 설화세계에 머물게 되고 그렇게 표현된 것에서 설화적 메시지, 즉 상징적 의미를 찾게 된다. 이러한 상징 혹은 표징을 통해 실제 삶 안에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적용과정이 잇따르게 된다.
② 독자비평방법
이 방법은 텍스트 자체의 의미전달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틀에 박힌 기계적인 구조분석에 머물지 않고 독자가 개입되어 실용적인 의미를 추구한다. 이 방법은 두 가지 극점을 규명하는데, 예술적 극점과 미적인 극점이다. 전자는 저자의 창작에 해당되는 점으로서 작품의 일부분이고, 후자는 독자들의 작업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작품의 다른 부분을 차지한다. 독자들의 상상을 통해 독자들이 작품을 이루어나갈 때 성경은 살아 움직이게 된다.
③ 설화적 방법
이 방법론은 성경 텍스트에 묘사된 내용을 하나의 설화로, 이야기로 전제하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는 다른 문학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대개 <설정 및 문제제기 → 전개, 발전 → 절정 → 쇠퇴 → 결론>식으로 형성된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관점을 알아내고 그 관점 내에서 그리고 그 관점 이외의 위치에서 사건의 전체를 파악하게 된다. 이야기는 줄거리에 국한되지 않고 독자를 끌어들임으로써 작품의 메시지를 알아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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