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2007년 5월 6일
요한 13, 31-35.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기원 후 100년경입니다. 그때 세 개의 다른 복음서들은 이미 기록되어 신앙 공동체들 안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이미 기록된 복음서들 안에서 주제들을 정리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지닌 의미를 명상하는 기록입니다. 그 시대 신앙 공동체들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유래된 성찬을 이미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최후만찬 이야기를 새삼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신앙공동체가 실천하고 있는 성찬의 의미를 명상합니다. 그것이 최후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이야기였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의 몫입니다. 종이 할 일을 몸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성찬에 임하는 신앙인들도 그렇게 헌신적인 종의 모습으로 섬김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 발 씻은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말할 때는 그분이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그분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그 죽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 지를 우리에게 알린 결정적 사건이었고,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사람들이 알아보는 영광스런 계기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셨습니다. 무자비한 인간 세상은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 죽음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그 시대 유대교 당국이 하느님에 대해 가진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높고 훌륭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 세상입니다. 하느님도 홀로 높으시고, 홀로 군림하신다고 믿는 우리들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그들의 위세를 뽐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자기 한 사람 잘되기 위해 하느님과 교섭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당국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여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을 왜곡하는 거짓 예언자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탐합니다. 종교 집단도 사람의 모임이라 그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동료 인간에게 군림하고 횡포를 일삼습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하느님을 후광으로 그들의 횡포를 정당화합니다. 흔히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혹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릅니다. 그것은 사이비 종교 집단에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재물과 권력이 보이는 곳에 인간은 늘 횡포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의 실세인 율사와 제관들도 걸핏하면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으며 횡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횡포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알다시피 민족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그들 위에 왕 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려 누릅니다. 그러나 그대들 사이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2-43).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모태인 이스라엘의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고, 이웃을 위해 그 실천을 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함께 살아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출애 33,18-20 참조). 창세기 3장이 말하는 원조의 범죄는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중심적 존재가 되면서 인류역사 안에 죄가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에게 자기의 뜻을 강요하고 횡포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으셨고, 횡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고쳐 주고, 나병환자를 만나면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을 만나면 용서를 선포하여 죄책감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으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자비하신 아버지를 느끼도록 실천하셨습니다. 후에 베드로 사도는 그분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행하셨습니다.”(사도 10,38).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으로 원하는 것,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내가 받을 혜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나를 높이 평가하고 대우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킬 계명을 잘 지켜서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겠다는 마음이라면,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이웃에게 흐르도록 자기 스스로 묵묵히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사람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류역사 안에 흐르게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혜택을 얻어내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상 받기 위한 수작도 아닙니다. 기도, 미사, 헌금 등은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위한 절차입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내가 섬겨야 하는 이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그 사람 안에 흘러들 것을 빕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예수님의 내어주고 쏟으심을 기억하고 그 실천 안에 우리를 동화시킬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헌금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되새깁니다. 이렇게 기도도, 미사도, 헌금도 모두 사랑하고 섬기시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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