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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 연속기획)4. 사람이 어찌 죄를 사하는가?
작성자   :   강명수 등록일 2007-10-17 조회수 1116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ㅋㅋㅋ ^^;;;;;;;

 

4. 사람이 어찌 죄를 사하는가



송양;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신부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신부님은 신도들의 죄를 사해 주는 고해 성사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신부도 사람인데 어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해 줄 수 있습니까?

박신부; 이 먼저 고해성사(告解聖事)라고 하셨는데

그 성사(聖事)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송양; 그냥 고해 성사를 통해 신도들의 죄를 사해 준다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박신부;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2천 년의 전통을 가진 가톨릭 교회에만 정화한 성사가 있습니다.

성사란 무엇인가 한다면

'성사는 예수님이 설정하신 것으로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주시기 위한

유형(有形)한 교회의 의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사론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송양! 성서를 펴 봅시다.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 13)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야고 5, 14)

송양, 개신교에서 목사님들이 환자를 찾아가서 기름을 바르는 것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양; 그냥 병자를 위한 심방과 기도하는 것은 보았지만 기름을 바르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박신부; 성서에는 분명히 기름을 바르라고 했지요?

가톨릭에서만이 기름을 환자에게 바르면서 그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을 병자 성사라고 합니다.

개신교에는 교파가 너무나 많아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파마다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

그런데 예를 들면 루터파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세례 안수식 성찬식 등이 종칠 의식의 중심이 되고 있지마는

가톨릭에서는 7성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7성사는 곧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만드신 은총의 전달 조건이 됩니다.

간단히 소개한다면

성세성사(聖洗聖事)(요한 3, 5), 견진(堅振) 성사(사도 8, 14-17), 성체(聖體) 성사

이 성사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자세하게 이야기해야 될 줄 믿습니다.

네 번째로 고해 성사 그리고 병자 성사와 결혼 성사(마태 19,4-6),

마지막으로 성품성사(聖品盛事)(루가 6, 13)입니다.

송양이 가톨릭을 더 깊이 알고 싶으시면 개신교에 전연 없는 7성사의 개념과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송양; 차차 시간이 되면 공부할 수 있겠고요.

우선 고해 성사에 대해서 말씀 듣고 싶습니다.

박신부; 송양! 먼저 제가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이 인간 박신부가 내 개인의 자격으로

고해 성사를 집행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여 둡니다.

먼저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법정에서 죄수들을 앞에 놓고 재판장은 무죄 석방 또는 사형 선고를 선언합니다.

법관도 사람인데 어찌하여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판결을 내립니까?

송양; 그거야 당연하지요 국가로부터 사법권을 가지고 있으니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아닙니까!

박신부; 그렇습니다. 가톨릭의 신부도 그리스도로부터

사죄권(赦罪權)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죄를 사합니다.

송양; 그리스도로부터 사죄권을 받았다고요?

박신부; 개신교에서는 감히 이런 말도 할 수 없으며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서 개신교는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이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2천 년 전통의 교회로서

바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인류 구원의 사명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가톨릭의 한 신부라는 점에서

저에게 부여된 사제로서의 신권(神權)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소급이 되고 있음에 신부로서 긍지와 자부를 갖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다른 개신교에서는 없는 성품 성사가 있기에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주어진 권한 안에서 신권을 이행합니다.

송양; 성서의 근거를 듣고 싶은데요?

박신부; 예! 예수께서 중풍 병자에게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 2)하시며

사죄권을 행사했을 때에 율법학자들은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면서

하느님 이외에 누군들 사죄할 수 없음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이 세상의 죄악을 없애고

인류를 진리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죄권은 세상 끝날 때까지의 모든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죄권이 그의 제자들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지 않고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사죄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이 세상 마칠 때까지 계승하여

전 인류가 구제를 받기 위해서 그의 전권을 제자들에게 부여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 16-19)



이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

그리고 그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죽음 의 힘', 즉 어떤 오류와도

세상의 어떤 사조와도 아랑곳없이 굳건히 커 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송양, 개신교에서는 이 성서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아십니까?

송양; 글쎄요?

박신부; 그들은 정통적인 베드로의 교회를 부인하기 위해 인간 베드로에게 약속한 교회가 아니라

그의 신앙 위에 세운 교회라면서 신앙만 있으면 구원이 된다는 이론을 펴 나갑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인격을 무시한 그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란 상식적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이 반석 위에 ',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이런 표현은 베드로의 인격에다가 하신 말씀입니다.

신앙 위에 그런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성서의 전후를 보면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고백했기 때문에

수위권(首位權)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런 권리를 받을 수

있었던 조건이고 그것을 받은 인격의 주체는 곧 베드로입니다.

어떤 국가의 원수가 어떤 총명한 사람에게 어느 나가 대사로 임명하면서 전권을 부여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그 인격체에게 주어진 권한이지

그것이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수완에 부여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특별히 사죄권을 주신 기록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0-23)



이 이상 더 명확한 말씀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사죄권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고

이 사죄권을 또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승해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2고린 5, 18-20)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한 것은 곧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그리고

참회를 할 때마다 나타나셔서 그에게 죄를 사해 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사죄권을 맡겨 대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실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대업을 모세에게 맡기셨습니다.

파라오의 추격을 당할 때에도, 사막 가운데서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에도

하느님이 직접 하시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모든 권한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사죄권을 사람들에게 맡기신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이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2고린 5, 18-20)

'그리스도의 사절' 또는 '우리를 시켜', 이 말씀은 곧 성품 성사를 받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개신교는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사죄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해 성사를 이해 못합니다.

송양; 그런데 신부님들은 죄를 어떻게 합니까?

박신부; 아무리 법정에서 재판권을 행사하는 법관이라도 지를 범하게 되면

또 다른 법관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듯이

신부들도 다른 신부들 앞에 가서 죄를 고백하고 고해 성사를 받습니다.

주교들도 추기경들도 교황님도 신부 앞에서 고해 성사를 받습니다.

송양;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신부 앞에 가서 고백만 하면 죄가 사해지니

결국 더 쉽게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박신부; 역시 고해 성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데

고해 성사는 일종의 재판이라고도 한 수 있습니다.

재판장은 고백을 듣는 신부이고 원고는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고 피고도 동시에 고백하는 당자입니다.

결국 자기 죄를 자기가 스스로 고발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이 재판,

즉 고해 성사에는 어떠한 변호인도 증인도 어떤 증거물도 필요가 없는 가장 완전한 재판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자백하는 그 마당에는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해 성사의 핵심은 그 죄에 대한 참회의 자세입니다.

또한 남에게 끼친 정신적인 손해나 물질적인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해야 합니다.

결국 고백자는 이러한 조건이 구비된 재판소에서

다시 그런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적어도 그 순간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형사 재판을 받은 죄수가 감옥 생활 5년을 치르고 나왔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죄를 다시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도리어 송양에게 묻고 싶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직접 하느님께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도리어 죄를 더 쉽게 지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송양; 어째서요?

박신부; 보십시오. 스스로 자기 죄를 하느님 앞에서 고백했지 마는

하느님은 그 죄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보상을 요구하면서 꾸중을 하십니까?

범죄한 데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교훈을 주십니까?

하느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죄를 어떤 모양으로 짓든지 모두 혼자서 하느님과 해결해 버린다면

사죄의 방법이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더 쉽게 범할 수 있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느님이 죄를 사해 주셨는지 에 대해서 어떻게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매일같이 하느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없어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송양; 하지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어쩐지 ?

박신부; 역시 고해 성사의 뜻을 모르는 말씀이지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해결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실리오 성인의 말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고백에 있어서는 육체의 병을 치료하듯이 해야 한다.

병자가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함부로 치료를 받지 않고 의학과 지식이 겸비한 의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병 증세를 자세히 고하고 그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영혼의 병인 죄를 없애고 치료받기 위해서도 사죄권을 가진 자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 한다.'

초대 사도들의 교회에서도 죄를 고백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도들이 와서 자기들이 과거에 한 일을 낱낱이 털어놓고 자백하였다.'(사도 19, 18)



그리고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모든 것을 풀고 매는 권한을 가진 교회가

그들이 범한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풀고 매는 권한을 발동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죄는 언제나 그 죄에 해당되는 보상, 즉 보속이 따라야 합니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 죄에 해당되는 옥고를 치러야 되듯이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범한 죄를 알지 않고는 정확한 교정이나 죄에 해당되는 보속을 줄 수 없습니다.

송양! 소위 '범죄인의 심리'라는 특수한 인간 양심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범죄한 그만큼의 보상을 치러야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또 아무도 몰래 범한 죄일지라도 그것을 토로하지 않고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독약을 마셨으면 그것을 토해야 하고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혀 있으면

그것을 뽑아 버려야 근본적으로 치료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범한 다음 그것을 토해 버려야 근본적인 양심의 상처가 아무는 것입니다.

요즈음 소위 '정신 요법'이란 정신과 의사들의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신 요법이란 결국 그 사람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털어 내어놓고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어떤 정신과 의사가 가톨릭의 고해 성사를 연구한 다음 한 말이 너무나 유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 최대의 심리학자였으며 인류 최초의 정신 분석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교훈은 무엇을 뜻합니까?

범죄 수사관들의 말을 들으면 숨어 있는 악한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면서 하는 말들이 '이제야 안심이다.' 한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의 죄가 드러났고 드러난 그만큼의 보상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사제 생활 근 35년간의 가장 보람되었던 것이 있다면 고해 소에서 많은 죄로 신음하던

그들이 죄를 다 털어놓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신도들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제가 25세 때 신부가 되어 고해소에 있으면

국회 의원, 법관, 대학 교수들이 무릎을 꿇고 죄 고백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진정 그들의 겸손한 자세는 하느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무거운 심판을 거부할 능력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진정 한 인간 신부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그러한 겸손한 자세가 없이 뻔뻔한 자세를 취한다면 어떻게

감히 우리가 주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의 목사님도 신도들의 신앙 생활 지도를 하시고 때로는

죄의 고백도 듣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각 학교마다 카운슬링을 맡은 선생님들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살다보면 부부끼리도 할 수 없는 얘기,

부자간에도 할 수 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독신자 신부 앞에서, 더구나 그리스도로부터 사죄권을 받은 사제 앞에서

다 털어놓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그 아름다움은 경험을 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송양; 대략 알아들을 만합니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신부님들이 신도들의 죄를 듣고 남에게 누설을 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박신부; 역시 고해 성사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의 말씀이지요!

고해소에서 일어난 사실은 거기에서 끝나고 맙니다.

고해 비밀은 사제들이 생명을 걸고 옹호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가끔 그런 사실을 보지 않습니까?

생명을 걸고 고해의 비밀을 지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이 2천 년 가톨릭 교회 역사상 신부들이

인간적으로 타락한 적은 많아도 고해의 비밀을 폭로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도리어 고해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은 순교자들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서울 명동성당에 임시로 있을 때입니다.

밤중에 누군가가 거칠게도 저의 방문을 두들겼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험상궂은 젊은 청년이 찾아와서

'신부님, 오늘 저녁에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죄를 고백하기 위해 신부님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아무런 종교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앙심의 가책을 막을 길이 없어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죄를 범하는 인간 범죄의 불안한 상황입니다.

송양;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개신교의 참회 행위를 어떻게 보십니까?

박신부;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목사님들은 어떤 신권(神權)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개신교에는 성품 성사가 없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면 그 교회의 근원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소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사함도 고작 하느님 앞에서의 참회로만 일관합니다.

가톨릭에서도 진실한 참회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도 가르칩니다.

또는 극기, 희생, 자선 행위 등으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참회가, 그 극기가 어느 정도냐가 언제나 문제로 남아 있고

그런 행위는 많은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행위일 뿐 성사적인 입장에서

어떤 확신을 줄 수 없기에 일차적으로 가톨릭에서는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사죄권을 가진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송양; 사죄권을 갖지 않은 신부도 있습니까?

박신부; 예, 있습니다 고해 성사를 하나의 재판 형식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어떤 법관이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관할권을 통한 상부의 권한 위임을 받아야 하듯이

고백을 듣는 신부도 사죄권을 교회를 통해서 정식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죄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오해가 소위 면죄부란 사건이지요.



- 스테파노 -



다음에는

5. 소위 면죄부 사건의 진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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