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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2 하나 뿐인 목숨을,
작성자   :   한용수 미카엘 등록일 2012-09-17 조회수 2128

신앙 때문에 잃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순교자들의 삶을 현재의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매년 순교자 성월을 보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하고 혹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흔치 않은가?

순교자를 위한 기도도 바치기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13구역 하상회에서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올 해는 서울의 순교 성지를 찾기로 하여 서울 시내의

순교성지를 찾다보니 서울에도 순교성지가 그 외로 많은 것을

  알게되었고 그 중에서 순교자가 가장 많은 서소문 순교지를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서문 순교 성지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서소문 순교 성지 기념관'을 방문하여

순교와 관련한 자료를 본 후 가기로 하여 기념관에

도착 하니 바로 앞에 수녀님이 학생들을 인솔하고

기념관으로 들어가 저희도 자연스레 뒤 따라갔습니다.

 

수녀님이 미리 방문 예약을 하셨는지

기념관에 도착하자 직원이 바로 순교성지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많은 자료가 있어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직접 설명을 듣다보니

순교 과정이 너무도 가슴아프게 와 닿았습니다.

 

그러면서 박해시대도 아닌 지금 여러 사정으로 인해

쉬고 있는 분들이 생각 난 하루 였습니다.

 

혹시 서소문 순교성지를 방문 하려고 계획 중인 분들이

계시면 먼저 서소문 순교성지 기념관(중림동 약현성당 내)을 방문하셔 그곳에서 자세한 안내를 듣고 방문하시게 되면 더욱 뜻 깊은 순례가 될 것입니다.  

 

아랫 글은 서소문 성지에 대한 굿뉴스 에서

일부 만을 옮긴 것입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우리의 순교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렇듯 잔인한 대우와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첫 순교자들로부터 80여 년 뒤인 1887년에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사적 제 252호)이 완공되었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알렉산델)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이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소문 밖은 분명 한국 교회 최대의 순교 성지였다. 103위 성인 중 44명이 이곳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교회 측에서는 시성식이 이루어지던 1984년에 순교 기념탑을 서소문 공원 안에 건립하였으니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훼손된 상태이다.

 

[차기진, 사목 242호(1999년 3월), pp.9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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